십년 정도 됐을까. 내가 니체를 만난 건. ^^ 그때 만난 니체를, 그가 남긴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흘렸더랬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니체 말고 재미있는 게,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았달까. 그래봤자 술 마시기고, 그래봤자 아르바이트로 용돈 벌기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2년 전, 그린비 출판사에 고병권 선생님 강의를 들으러갔다가 니체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사실, 직장에서 니체를 이야기하는 사람 만나기는 힘들다. 까마득히 잊을만한 환경이었달까) 그래도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한다면 좀 억지인 것이, 당시에는 '아, 고병권 선생님은 니체를 참 좋아하는구나' 정도의 느낌을 가졌을 뿐이었다. ^^ 그때 고병권 선생님 말(그저 감전될 기회를 기다려라)처럼, 어느 날 갑자기 니체를 우연히 만나 니체에 감전된 것,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겠지.
니체를 읽어볼까 생각하게 된 건 Gblog 4호를 받고서였다. 4호 주제는 철학이었다. 『철학 VS 철학』의 절반을 읽은 지금, 철학의 매력에 쑥 빠진 건 사실이지만, 새로운 책이 등장하면 주저없이 순위를 내주고 말았다. 철학은 내게 너무도 진지한 무엇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가볍다 생각되는 소설이나 인문서에 손이 먼저 가는 것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지난 3권의 Gblog와 다르게 이번 호는 두세 번에 걸쳐 다시 읽기를 했다. 뭔가 덜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였다. 그런 후에야 니체를 만났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서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반했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대체로 처음 만난 이성의 등짝에서 빛이 난다고도 하는데, 정말 그런가? (경험이 없어서;;) 반하다가 매력을 느끼다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면, 솔직히 나는 니체에게 반했다. 니체의 박식함이 좋고, 그것을 역설과 패러디로 전하는 방식도 좋고, 그의 독설이 좋고, 그의 자신감 혹은 왕자병도 좋고, 그의 언어 유희는 더 좋다. 그리고, 부정을 집어삼키는 그의 긍정이 무엇보다 좋다.
언젠가부터 나는 사회에 反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사회 면면에 ‘부정의 눈’을 들이대니 당연히 세상은 아름답지 않았다. 어느새 불만이 쌓이고 쌓여 허무주의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걸 해서 뭐해.’ 혹은 ‘내가 이래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 결과는 똑같아.’식의 논리가 나를 지배하게 된 것. 당연히 기대감 제로! 참 기댈 언덕도 없는 세상이라며 체념하게 됐다.
해결책은 없을까? 해결책으로 캔디의 긍정성을 갖기는 싫었다. 무조건 참고 또 참고, 울긴 왜 우냐며 안 울고, 그렇게 눈물을 뒤로 감춘 채 웃고 싶지는 않았다. 앗, 그런데 뿅하고 나타났다. 바로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책 한 권이, 고질적 문제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면 믿겠는가. ^^; 책은 필요에 의해서 다르게 다가온다. 무슨 뜻이냐면, 내게 간절히 풀고자 하는 문제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고민을 담고 있는 책이 나타나면 나의 필요와 딱! 마주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만난 책은 잊을 수 없는 ‘책’이 된다.
말 그대로 니체의 책은 꽤 위험하다. 하지만 이 책으로 공포에 떨어야 하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 지배계층이다. 왜냐하면, 니체는 전복을 꿈꾸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임금노예로 살아가는지, 왜 국가에 복종하는지, 왜 순수한 인식을 꿈꾸는지 생각한 적 있는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이 지배계층이 관리하기 쉬우라고 만들어 놓은 장치였다고 생각해보라. 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는 관습처럼 온몸에 새겨진 가치들을 믿지도, 따르지도 말라고 한다. ‘내가 꿈꾸는 것, 그것이 법이다’라는 생각으로 가치를 창조하고 생성하라고 한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수많은 부품이 필요하듯이 자신이 자신이기 위해서는 놀랄 만큼의 많은 것이 필요해... 그것들 전부가 내 일부이고, 나라는 의식 그 자체를 만들어내지.. 하지만 그것들이 동시에 나를 어느 한계로 제약해." -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中
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죽음을 욕망하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죽음이란, 지금까지 인간적인 것으로 떠받들고 내면화했던 것에 웃음을 터뜨리는 일이다. 그렇게 내면화된 가치를 죽이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생성하라고 종용하는 것이다. 스스로 만든 가치 속에 있을 때, 삶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
솔직히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고, 너무 많은 깨달음을 얻어 어떤 말로 이 책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붙여 치장해주고 싶지만, 이 책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읽기를 권하고는 싶다. 철학자의 말은 항상 어렵다고 느껴 접근조차 힘들었다면 저자(고병권)의 친절한 해설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철학이란 먼 나라 이웃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면 지금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니체를 만나볼 일이다. 또한 철학을 나열하는 방식이 옛날 선생님들 이야기처럼 지루해 몇번이나 읽기를 포기했다면, 해설과 함께 재미까지 느낄 수 있다고 장담(?)하겠다.
이 책을 다 읽은 나는 고병권의 니체, 데리다의 니체, 푸코의 니체, 들뢰즈의 니체가 아닌 '나의 니체'를 찾는 중이다. 고병권의 니체를 읽으면서 니체에 꽂혔는데, 그것이 나의 니체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재해석이 니체가 바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천 개의 니체로 해석되는 것이 가능한 텍스트이길 바랐을 거라 생각한다.
그건 그렇고, 철학이 왜 재미없는 걸로 인식되었을까. 딱딱하고 어려운 말이 많아서? 모호해서? 아니면, 다 오래된 이야기 같아서? 나 같은 경우는 솔직히 나열한 모두가 원인이었다. 그래도 욕심은 있어서 이 책 저 책 집적거렸지만, 언제나 원점! 글자만 읽는 현상이 계속되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니 기회가 생기기는 한다. 『철학 VS 철학』을 읽으면서였다. 철학자의 논리가 지금 내 상황과 접목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포스팅 보러 가기) ‘남’이 아닌 ‘내’가 ‘옛날’과 ‘지금’을 연결하다니! 그것이 바로 철학에 재미를 느끼게 된 포인트였다. ^^ (내공 많은 사람들이 보면 웃음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내게는 큰 사건이었으니!) 멀게만 느꼈던 철학을 친구처럼 가깝게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백년 전, 니체의 말이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고, 연관이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단호하게 말한다. 참 밀접하다고! 텍스트를 통해 확인하는 순간, 그렇게 묻는 당신도 철학의 바다에 풍덩 빠질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