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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창시절 과학은 어렵기만 했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암기 위주로 공부하다보니 더 싫어졌다. 싫다고 외면할 수 없는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나 복숭아를 신선하게 유지해주는 냉장고는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이었으나, 어떤 과학 기술의 원리가 숨어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 시절엔 적어도 소중한 냉장고를 재미없는 과학과 연결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냉장고와 연관시키는 과학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기호와 공식이 난무했을 뿐. 지금 생각해보면, 일상과 무척 밀접한 것이 과학인데, 부러 무관심하게 만들기 위해 과학이란 과목을 재미없게 만든 건 아닌가 의심해본다. 그래야 속이기 쉬우니까. ^^;

 


그 시절, 그러니까 과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비호감이 일상으로 이어지던 때에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란 책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신명나게 공부했을 것 같다.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사회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알 건 알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이 책은 과학자를 꿈꾸는 친구들과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 보통 사람을 위한 책이다. 권력과 손잡고 정직한 과학자의 길을 포기하는 작금의 현실에 정의를 구현할 과학 인재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도록, 그리고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하루 24시간을 과학 기술에 둘러싸여 사는 우리가 문제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4년 정도 됐을까? 『침묵과 열광』이라는 책을 읽었다. 당시 떠들썩했던 황우석 사태에 대해 기록한 책이었는데, 과학기술이 국가 권력과 손잡고 희대의 사기극을 벌였다는 것에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객관적’이기 때문에 믿고 보는 과학인데, 그 과학이 권력과 손잡고 언론을 등에 업고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관심을 갖고 둘러보면 과학자의 입을 빌려 우리의 눈과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셀 수 없이 많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중요하다. 하지만 발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과학을 제대로 쓰는 기술이다. 과학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객관성을 갖고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사람들이, 권력이나 돈과 타협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엉망이 된다.

  
  


과학 기술이 인간의 필요와 협상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꽤 좋은 예이다. 자전거와 같은 것. 자전거의 탄생은 어떨까? 자전거는 본세이커에서 하이휠로 정착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치마를 입은 여성이 탈 수 없었던 것. 이런 여성들을 위해 프레임 모양이 바뀌면서 탄생한 것이 세이프티 자전거(지금의 자전거와 유사한 모양)이다. 세이프티가 하이휠에 비해 기술적으로 우수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당시 여성의 목소리와 필요를 반영한 과학 기술의 결과물인 것이다. 당시 여성이 바지를 입었다면, 지금의 자전거 모양은 하이휠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과학 기술이 정책적으로 유리함을 얻기 위해 조작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예로 자동차를 들 수 있겠다. 자동차는 처음 연간 37개 정도의 타이어를 갈아치울 정도로 불안정한 탈것이었다. 이런 불편에도 대중은 열광했다. 바로 정부의 지원과 언론의 조작 덕분이었다. 정부는 철도를 죽이고 자동차를 살리기 위한 정책(자금 지원 및 도로 확충)을 실시했고, 언론은 자동차 여행이 간에 좋다, 결핵의 치유법이다, 핸들을 돌리는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식으로 근거 없는 기사를 써댔다. 결과는 어마어마했다. 바야흐로 자동차 왕국 아니던가. 자동차로 사망하는 사람 수가 늘어나도, 대기가 오염돼도, 주차장 때문에 집 지을 공간이 없어져도 자동차만은 포기 못하겠다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언빌리버블!

또 있다. 바로 핵폭탄이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한 것은 발악하던 일본을 제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1945년, 일본은 이미 궤멸상태에 있었기에 굳이 그 끔찍한 일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 하지만 당시 세력을 잡은 투르먼은 신무기의 위력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참혹한 일을 저지른다. 원자로가 가동되는 순간 과학자들은 ‘우리는 모두 개자식’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때 과학자들은 무시무시한 권력과 타협한 개자식이 맞다. 그 끔찍한 일을 보고도 핵무기 개발을 멈추지 않는다. 핵폭탄은 원자력 사업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운운하며 전기를 생산해온 지난 수십 년 동안 지구를 몇 개나 날려버릴 핵폭탄을 보유하게 됐다. 

  
  


우리 시대에 과학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과학을 모른다고 해서 이렇게 뒷짐 지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현상을 보는 능력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과학자보다 나을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대해서 전문가가 아닌가. 과학과 일상을 연결시키는 능력은 우리가 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행보와 그가 남긴 이야기를 힌트로 남기며, 이 포스팅을 마무리한다.
1939년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핵폭탄으로 전쟁을 막을 것’을 권고했다고 하는데, 후에 참혹한 상황을 목격하고는 ‘내 생전에 저지른 한 가지 실수’가 바로 그 편지를 쓴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후 반핵, 반전을 활발하게 전개하는데, 그것은 과학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기본적으로 과학은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세상사에 관한 한 과학을 과대평가해서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서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전문가뿐이라는 생각도 잘못됐다. 사회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안전성이 심각하게 무너지는 현실에서 각 개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왜 사회주의인가』 중에서

결국, 아인슈타인은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감하는가. 그렇다면 당장 시작하자. 이 책 한 권을 읽는 것으로 이미 시작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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