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나탈리는 바쁘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동시에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일하고 있다. 삶에 흥미를 잃은 어머니는 에피소드 만들 듯 자살 시도를 한다. 지금 가르치고 있는 제자들 뿐만 아니라 졸업한 제자도 살펴야 한다. 이 정신없는 일상이 힘들고 불행한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적어도 여기저기서 나탈리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때로 힘들어보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평범을 가장한 일상에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상투성을 벗어난 자유

시작은 남편의 외도였다. 남편이 외도 사실을 고백했을 때 나탈리는 “왜 그걸 말해? 그냥 모르는 척 하고 살 순 없었어?”라고 묻는다. 자신의 일상에 파열음이 나는 것보다는 일상이 유지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남편은 집을 나갔고, 계속되는 자살 시도로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철학책은 폐간 일로에 처하게 됐고, 아끼는 제자 파비앵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비난을 받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모든 사건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과거에는 힘에 부칠 정도로 삶의 무게를 더하는 방식으로 사건이 일어났다면, 지금은 모든 걸 빼앗기는 방식으로 사건이 다가왔던 것이다.  자신을 필요로 하던 사람들에게서 거부당하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이런 나탈리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감정이 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일이!” 혹은 “나는 끊임없이 희생했을 뿐이야”하는 뉘앙스의 원한 감정이다. 이런 감정을 떠올리는 것은 매체를 통해서 혹은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반응이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나탈리는 이런 예상을 번번이 뒤집는다. 원한 감정을 표출하기 보다는 혼란스러운 감정들과 정면으로 대면한다. 적어도 사건을 통념에 맡기지 않는 것이다.  

 

 

파비앵은 각별한 제자였다. 파비앵은 나탈리의 철학과 배려로 자신이 어려운 때를 견뎌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차를 마시고 자신의 속내를 나누는 장면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예상했다. 남편 하인츠와 헤어지게 되면, 남편의 자리는 파비앵으로 대체되겠구나 하는 거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끝까지 삶을, 인생을, 철학을 나누는 지기로 남는다. 둘의 관계에 대한 상상력은, 나의 상투성에서 나온 뻔한 예측일 뿐이었던 거다. 시골에 공동체를 만든 파비앵을 만나러 가는데, 그녀는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떠나가니, 비로소 완벽한 자유가 찾아왔다”고.

이후 나탈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크게 동요되지 않는다. 자신의 책이 폐간되었음에도 그것을 인정했고, 남편과 아이들이 떠난 집에 홀로 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엄마가 남긴 고양이 판도라도 떠나보낸다. 모든 것을 잃는 방식으로 그녀의 삶이 구성되지만, 그녀는 외롭거나 고독해보이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비로소 일상을 찾은 듯 보였다.

남편 하인츠는 젊은 여자를 만나 25년 동안 함께한 부인 나탈리를 떠났다. 크리스마스에 나탈리를 찾아오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놓고 간 쇼펜하우어의 책 때문이었다. 나탈리가 아이들을 대접하기 위한 요리를 준비하면서 크리스마스 계획을 묻자, “혼자 있을 거”라고 대답한다. 불륜으로 시작된 관계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초대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 서운하지 않냐는 나탈리의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다’고 대답한다. 자신에게는 ‘좋은 책과 살라미, 와인’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래서 부부로 25년을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들갑을 떠는 경우가 없다. 우리가 흔히 서운함이나 증오를 느끼는 지점에서 그들은 다른 감정으로 대응한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현실에서 작동하는 철학 

이 영화는 묻는다. 다가오는 모든 것들은 지금의 삶에 질문을 던진다고. 이럴 때마다 어떻게 대답할 거냐고! 어떤 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계를 새롭게 구성할 거냐고 말이다. 나탈리는 철학에서 찾는다. 학생들에게 루소의 글을 읽어주면서 그의 문장을 아무렇게나 해석하지 말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글에서부터 혁명이 시작되었다면서! 그렇다. 나탈리는 자신에게 찾아온 질문을 철학을 통해 혁명하는 방식으로 답을 찾은 것이다. 고통에 대한 남다른 상상력은 그가 공부한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철학적 동지라고 생각했던 파비앵에게서 비겁한 현실주의자라는 비난을 듣게 된 것이다. 파비앵은 지금의 현실을 견딜 수 없어, 혹은 타협할 수 없어 시골로 내려가 공동체를 꾸린다. 파비앵 입장에서는 혁명을 시도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며, 기껏해야 서명운동에 서명을 하는 정도로 양심을 지키며  사는 건 위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온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 혁명이라는 게 가능하냐는 질문이 아닐까? 이에 나탈리는 자신에게 혁명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그것이 지금 이 현실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혁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명망 높았던 책이 폐간되었을 때도,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담담했다. 폐간 이유는 시대적 감각에 뒤처진다는 것이었다. 표지를 화려하게 만들고, 주석을 달고, 문장을 고쳐 대중적으로 만들어야 판매고를 올릴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탈리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이 태도에서 나탈리의 신념이 드러난다. 시대적 조류가 바뀐다고 해서, 유행과 같은 가치에 휩쓸려 삶의 태도를 쉽게 바꾸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말이다. 철학은 어렵다. 그 어려운 문장을 독해하느니, 쉽게 쓰여진 글이나 말에서 도움을 얻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쉽게 얻은 지식은 삶의 지혜로 작용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철학은 그녀가 '다가오는 것들'로부터 지혜를 발휘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녀가 철학하는 이유는 거대담론에 있기보다, 지금의 현실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힘에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파비앵과 작별을 하고 파비앵은 다시 시골로, 나탈리는 파리로 돌아오는 장면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나를 곤란하게 하는 것들 속에서 살아보겠다는 나탈리가 파비앵보다 더 용감해보이는 장면이었다.  

 

 

대부분의 미디어, 그리고 교육은 '어떻게 살아햐 하는가'라는 질문에 정보를 전달한다. 물론 이 현실 세계를 살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이 많다. 하지만 통념에 묶이도록 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슷한 코드를 가지고 살아간다. 희로애락을 느끼는 지점이 거의 동일하다. 희로애락을 함께할 수 있는 게 축복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을 신파로 만들고, 원한에 휩싸이게 만들고, 자책하게 만드는 코드로 작동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패턴에 ‘왜 그래야 하지?’라는 질문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 같다. 또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그들의 책이 영화를 통해 내내 거론되는데, 그 반가움도 만만치 않다. (물론, 언급이 되는 것이지, 적극적으로 쓰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영화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

 

좀 한가해진 틈을 타서, '논어'를 공부해보자 생각했습니다. 일상적으로 많이 인용되는 책이기도 하고, 고전 오브 더 고전이기도 한 논어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공자에 대한 (알 수 없는) 애정같은 것에서 시작된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에는 『논어집주』라는 어마무지한 책을 읽으려고 했으나, "그렇게 시작하면 논어를 절대 읽을 수 없다!"는 충고에 힘입어 워밍업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읽은 것은 『인간 공자』와 『공자와 논어』인데요. 읽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이 책들을 먼저 읽기를 잘했다고요~ 공자라는 인물에 대해, 공자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제자들과 대화를 나눴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도올 논어』는 읽다가 그만뒀습니다. 논어와 공자세가를 읽은 후에 읽기로! 도올 선생의 지식이 총망라되어 쓰인 책이어서일까요? 논어를 읽지 않고는 접근하기 쉽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하하...

 

먼저,『인간 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이 책은 중국의 허옌장이 공자의 삶을 소설로 쓴 것입니다. 출판사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극작가이자 감독 허옌장의 장편소설. 공자의 어린 시절부터 중년까지 노나라에서 귀족 세력과 각축을 벌이던 역사를 주로 담고 있으며 이 시기 공자가 겪었던 일들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사기> '공자세가', <논어> 및 전국시대와 진한시대에 내려오는 공자와 관련한 이야기를 소재로 채택했고 사건의 경우 관련 연대는 <공자연보>를 근거로 했다."  (발췌 : 알라딘 인터넷 서점)

 

픽션이 가미되기는 했지만, 이 책은 무척 사실적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관련 역사를 숙지한 후에 쓰인 소설이기에 그렇습니다. 허옌장은 공자가 예(규범)을 중시했고, 그 예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중심에 놓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의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어 분위기를 짐작하기 좋습니다. 특히, 당시의 역사를 잘 모른다면 더더욱 읽고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다음 책으로 넘어갔을 때에는 『인간 공자』에 나왔던 자잘한 스토리는 기억에서 지우고 읽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특히, 위나라 경공의 부인인 '남자' & 공자의 스토리는 뭔가 텍스트를 대할 때 방해를 받는 느낌이 들거든요. ^^;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나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논어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없는 자신감 말이죠~

 

 

다음에 읽은 책은 『요시카와 고지로의 공자와 논어』라는 책입니다. 말 그대로 요시카와 고지로가 본 공자와 논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논어에 대한 해석이 쏟아지고 있지요. 이는 똑같은 텍스트를 대해도 해석이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요시카와 고지로가 본 공자는, 논어는 어떠했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책입니다. 절반 정도는 <중국의 지혜 - 공자에 대하여>로 저자의 생각을 서술했구요. 뒤 절반 정도는 <고전 강좌 논어>로 실제 강의했던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동어반복되는 부분도 좀 있지만, 거슬리지는 않습니다. (^^) 강의를 듣듯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공자는 자신이 정치에 쓰이기를 바랐습니다. "누구라도 좋다. 나를 써주는 이가 있다면, 1년으로도 충분하다. 3년이면 멋지게 성과를 보일 수 있다"고 했고,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구매자를 기다리는 사람이다."라고도 했습니다. 자신은 예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 중원에 있는 모든 나라 사이에는 살육과 음모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죠. 그 혼돈 가운데에서 인간의 선의를 믿었던 공자였습니다. 인간을 긍정하는 정신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혼돈 가운데서 편안을 만들 수 있다 자신할 수도 없었을 터. 그러나 공자는 끝내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를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쓰이기를 바라 14년 가까이 주유천하했으나, 어떤 나라에서도 그를 써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공자는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고, 자신의 의지를 멈추지 않았던 긍정(여기서 긍정은 그 흔한 긍정과는 다릅니다)의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말하지 않았느냐? 그 사람됨은 한번 열이 나면 밥을 잊고, 즐거우면 걱정을 잊고, 늙음이 다가오는 줄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는 섭공이 자로에게 스승인 '공자'에 대해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자가 자신을 설명한 문장인데요. 이 문장으로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눈앞에 그려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런 사람이었기에 오랜 시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었다고 할까요;;

 

마지막으로, 공자가 강조한 '배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끝내려 합니다. 공자는' 정치'와 '학문'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정치는 자신이 가진 인간에 대한 애정을 최고로 표현하기 위한 방편이라 생각했기에 중요하다 했구요. 이러한 애정을 완성시키는 것이 학문과 지식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강조했습니다. 공자는 말합니다. 인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리석음이라고. 지식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페단은 방탕함, 믿음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도적, 정식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교(이는 편협한 정의감으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을 말합니다), 용기를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지러움, 강함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을 광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가치를 쫓는다고 해도 배우지 않으면 폐단이 생길 수 있음을 경고하는 부분이지요. 그래서 공자는 사려가 뒷받침되지 않는 행동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배움'이라는 것은 중요한 테제인 것 같습니다. 어떤 배움이냐가 문제이긴 하지만요~

 

공자는 인간에게 인(선한 본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있다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살육과 음모 속에서도 '인'으로써 세상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 확신했지요. 하지만 배우지 않으면 그 인조차 쓸모없어지기에 평생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쓸모를 정치로 실현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구요. 이 낱낱의 맥락들이 한 줄로 꿰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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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정도로 정리하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볼까 합니다. 혹시 논어를 공부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공유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젊은 시절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책이 참 좋았습니다. 도피행각을 벌이기에 적합한 책이었거든요. 나만의 세계에 빠지는 게 이상하지 않았고, 과거에 연연하며 사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책을 읽기 힘든 순간이 오더군요. 저는 하루키의 책을 차근차근 읽어온 독자가 아니어서 출간 순서에 따라 읽지는 못했어요. 『상실의 시대』 이후, 『해변의 카프카』『양을 쫓는 모험』『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신의 아이들은 춤춘다』『1Q84』등을 신나게 읽다가 『태엽 감는 새』를 읽던 중, ‘아, 더 이상 못 읽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이유를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는데, 특히 내면 세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공감이 되지 않더라구요. 이번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으면서 동일한 감정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거의 절정에 이르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희망을 발견했는데요. 그것은 이 글의 말미에 밝힐까 해요. ^^

 

 

하루키는 개인의 세계에 관심이 많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 매력에 빠진 사람도 꽤 많을 것 같다. 게다가 ‘우리는 하나’, ‘패밀리’, ‘가족공동체’ 등 단합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민족적 정서에 일침을 가하는 느낌도 없지 않았고! 하지만, 하루키도 변하기는 하는 것 같다.(벌써 환갑을 훌쩍 넘었으니) 인간이란 무엇인지, 우주는 인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 걸까? 작가라면 인간에 대한 관심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겠지만, 하루키가 관심의 방향을 살짝 틀었단 생각이 든다. 과거에는 개인의 정서에 집중했다면, 이젠 인간을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아서인데, 그 증거나 바로 이 책『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라고 생각한다.

 

오행으로 본 주인공들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나고야에 살고 있는 다섯 명의 친구(고등학생)가 공동체를 만들었다. 굉장히 견고한 모임이었다. 남자 셋, 여자 둘로 이루어진 이 공동체에는 균열의 조짐을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는데, 남녀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이성 관계를 제약한다는 윤리를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떠난 쓰쿠루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나고야에 남았다. 그럭저럭 1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 날 쓰쿠루는 공동체에서 추방당했다.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공동체의 결정이라고만 했다. 쓰쿠루는 이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살아갔고, 16년이 지나서야 그때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등장인물이 가진 색채다. 레드로 상징되는 아카, 블루로 상징되는 아오, 화이트로 상징되는 시로, 블랙으로 상징되는 구로, 그리고 옐로우로 상징되는 쓰쿠루. 이것은 의역학적 관점에서 보는 오행(목-파랑, 화-빨강, 토-노랑, 금-하양, 수-검정)이라 할 수 있겠다.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등장인물이 가진 성격이나 삶의 형태인데, 각각의 인물은 그 색깔이 대변하는 성격으로 규정되고 그들의 미래 역시 비슷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레드로 상징되는 아카를 예로 들어 볼까? 아카는 자신의 뛰어난 면을 내세우지 않고 한 발 물러서서 친구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한번 마음을 정하고 나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양보하지 않는 면이 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규칙이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교사에 대해서는 심각한 태도로 화를 내는 일이 자주 있었다. 천성적으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때때로 울컥하곤 하는 것도 특징이랄 수 있겠다. 아카는 커서 자기계발세미나를 주관하는 기업연수센터를 만든다. 두뇌회전이 빠르고 필요하면 달변가로 변하는 아카는 책략을 꾸미는 타입인데, 자신의 성향에 맞게 미래를 설계한 셈이다. (참고로, 불(火)의 속성은 이렇게 설명되곤 한다. 열정을 간직한 타입으로, 대중의 심리를 잘 읽고, 그렇기에 따뜻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대중의 심리가 잘 읽히기 때문에 대중의 흐름에 영합하기 쉽다) 흑색으로 상징되는 구로는 어떨까? 말이 빠르고 뒤뇌회전이 빠른 편인 구로는 시니컬하기는 하지만 독특하면서도 유머감각이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면 즐거운 사람이다. 그녀는 나중에 물처럼 흘러 핀란드에 가서 살게 됐고, 그곳에서 공예를 하며 특별한 세계를 구축하며 살게 된다. (물(水)은 지혜롭고 영리하다. 물처럼 유연하게 사고가 흘러가는 편이며 유머가 있고, 내면세계에 관심이 많다. 흐르는 물처럼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공교롭게도 이 다섯은 서로를 돕는 한편 자극함으로써 유지되는 관계 속에 놓여 있었던 거다. 오행은 서로를 상생, 상극하며 조화를 이룬다. 특히, 쓰쿠루로 대변되는 황색은 중용을 의미하는데, 마디를 넘기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쓰쿠루를 추방한 것은 공동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각자가 가진 색이 짙고 옅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좀 부족하면 상생하며 순환할 수 있고, 좀 넘치면 상극하며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없는 것은 좀 다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의역학과 소설이 만나는 지점인 서두는, 꽤 흥미로웠다.

 

의역학과 소설의 잘못된 만남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작가의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그리던 소설과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 훌륭한 재료를 구하기는 했으나, 기존의 방식대로 요리한 느낌이랄까. 특히 죽음 혹은 삶의 상실에 대한 해석 부분은 과거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적어도 우주(소우주)를 언급하고, 의역학을 공부했다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달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식의 소설쓰기라면, 그가 새롭게 시도한 방식은, 새로운 소설쓰기를 위한 방편이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쓰쿠루가 공동체에서 방출되고 난 후의 행적이다. 그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어둠에 세계에 천착해 반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갑자기 확 달라진 외모로(그래서 쓰쿠루가 16년이 흘러서 찾아간 아오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다시 태어났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마치 샤먼이 되는 과정을 떠오르게 한다. 혹은 부처가 되기 위한 고행의 과정일 수도 있겠고! 형식은 빌려왔는지 모르겠지만, 내용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샤먼과 부처. 그들이 변한 것은 비단 외모 뿐일까?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즉각적인 깨달음)를 겪었고, 그렇기에 곧 변했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쓰쿠루가 변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는 그냥 밥을 먹게 되었고, 일상을 살아가게 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과거에 연연하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이 부분 역시 소재는 빌려왔으나, 형식만을 차용한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몸과 우주에 대한 해석 부분이다. 우리는 흔히 몸을 소우주라고 부른다. 몸은 우주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도 지식이 미천해서 그 이상을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쓰쿠루는 구로의 삶을 소우주와 연결해 설명한다. 신천지와 같은 이상적인 공간(핀란드)에서 가족을 이루었고, 만족스러운 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나고야를 떠났다는 이유로 구로를 망명자라 칭하는 쓰쿠루는 망명자였던 구로가 핀란드에 정착해서 평화로워 보이는 가족 구성원을 만들었고, 그것이 바로 소우주와 같다는 논리를 펼친다. 물론, 순환의 패턴을 찾았다는 의미에서 소우주라고 규정했을지도 모르겠으나, 독자 입장에서는 극단적으로 미화시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노력 없이, ‘소우주’라는 단어만을 갖다 대입한 느낌이다. 독자가 소우주를 상상하기 이전에, 소우주라고 명명하여 알려주는 꼴인데, 이것은 소설의 독법과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주제를 담기에는 소재가 조금은 유치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은 좋았다. 하루키가 서 있는 자리가 짐작이 되었달까! 또는 같은 맥락의 다음 소설이 나올 거라는 예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소설은 이것보다 훨씬 더 깊숙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루키의 소설이 아메리칸 스타일이었던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가는 커트 보네거트와 레이먼드 챈들러로 알려져 있다. 또한 하루키 소설에 대한 문단의 평가도 그래왔으니까) 이 소설은, 서구 문학(혹은 문화)에 홀릭되었던 하루키가 동양의 학문(혹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자신을 지금껏 지탱하게 해줬던 아메리칸 스타일과 이제야 관심을 갖게된 학문이 즉각적으로 조화를 이루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책이기도 하구. 그래서였을 거다. 이 책은 듣도보도 못한 퓨전요리를 먹는 느낌이었다. 하루키가 앞으로 이 부조화를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해진다.

 

 

 


 

오랜만에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리는 것 같네요. ^^ 여름에 비해 독서량이 늘기는 했는데, 리뷰는 통 써지질 않더라구요. 천천히 한권씩 써나가야 겠습니다. 곱씹을 겸해서. ㅋ 줄리언 반스의 책은 처음이었습니다. 요즘 소설을 통 읽지 않다가 읽게되었는데, 반스의 책을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이었어요. 사유의 폭이 워낙 넓고 깊은 책이라 한번 읽는 것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조만간 다시 한번 읽어볼 생각이에요. 날 추울 때는 라이딩도 좋지만, 독서도.. 참 좋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주인공은 토니다. 주인공 치고 특색이 없다. 아니, 매력이 없다고 해야 할까?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쉽게 질투하고, 생각없이 센척하고, 상처를 받으면 치졸한 언어로 복수를 하는 그런 지질한 사람이다. 그의 예감은 번번이 틀린다. 대학다닐 때 베로니카라는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된다. 깊은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에 대해서 파악조차 하지 못한다. 그녀의 마음을 도통 읽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베로니카의 행동은 토니에게 있어 늘 예상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토니에게 베로니카는 쉽게 잡히지 않고, 도무지 모르겠는 인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환갑이 넘어 다시 베로니카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베로니카의 적의에 찬 시선을 꿰뚫지 못한다. 사십 년을 묵혀둔 한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베로니카에게 뒤늦은 연정을 품는 토니라니! 이 사람 참 철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게 우리인 것 같기도 하다.

 

제목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토니의 예감은 항상 틀렸는데, 틀리지 않았다니? 옳지 못한 제목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내 생각은 달랐다. 이 제목처럼 딱 맞는 제목이 있을까 싶었던 것. 이것은 주인공 토니를 향한 베로니카의 언어이기도 하다. 연애할 때부터 신물나게 느꼈던 그 눈치없음! 끝까지 알아채지 못할 거라는 베로니카의 예감은 어긋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처럼 집요하게 토니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베로니카의 편협한 시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에이드리언(베로니카의 남자친구)과 사라(베로니카의 엄마)와의 관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장애를 가진 동생, 알코올 중독으로 죽어버린 아빠, 더 멀어져버린 오빠 등, 베로니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토니의 편지 한 장을 두었다. 그렇게 토니에 대한 증오감을 키우는 베로니카의 집요함 역시 토니의 예상과 같았다. 그의 예감 역시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베로니카는 과연, 피해자인가?
이 책은 부분적으로 영화 올드보이를 떠오르게 한다. 세치 혀를 잘못 놀리지 말라는 것 같기도 하다. 토니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에이드리언이 자신의 前여자친구와 사귄단다. 그렇다. 기분 나쁠 수 있다. 내 이별의 원인을 에이드리언에게 돌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촉발된 감정으로 토니는 저주의 말을 쏟아낸다. ‘너희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 아이에게 뭔가 문제가 있어 평생 짐이 되었으면 좋겠다. 베로니카는 엄마라는 사람도 신뢰하지 않는 쓰레기니, 확인하고 싶다면 은밀하게 그녀의 엄마를 만나봐라’ 등등. 이렇게 생각없이 뱉은 말은 우연찮게 모두 현실이 되었다. 물론 퍼즐이 이상한 모양으로 변형되기는 했으나 토니의 말은 거의 실현되었다. 이렇게만 보면, 이 모든 상황이 토니가 쏟아낸 저주의 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전 애인과 친한 친구의 연애 사실에 충격을 받고 폭력적인 말을 했다고 치자. 그 편지를 고이고이 간직한 채, 자신이 겪게 된 모든 불행의 원인을 토니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토니를 (엄마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유혹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것, 이후에 토니의 친구인 에이드리언을 사귄 것, 그렇게 사귄 에이드리언을 같은 방식으로 집으로 데려간 것 등등. 베로니카 역시 이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불행을 ‘토니’라는 회로를 통해 해석할 수밖에 없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생각했다. 베로니카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일 수도 있다고. 자신이 놓은 덫에 자신이 걸려들었음을 인정해야 될 때라고. 어쩌면 토니는 우연히 걸려든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달리 쓰여지는 역사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역사’란 단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을 제대로 통과하려면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 혹은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역사라고 해서 거창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개인에게 일어난 조그만 사건도 역사라고 볼 수 있으니까!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치자. 당시에 겪는 감정과 그 사건을 서술하는 방식! 그것이 십년이 지나도 동일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또, 같은 사건을 겪은 두 사람이 각각 기억하고 서술하는 방식이 똑같을까? 그럴 수 없을 거다. 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다를 것이고, 십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십년 후에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달리 회고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역사라는 게 믿을만한 것이기는 한 건가. 이런 차원이라면 ‘역사란 살아남은 자의 회고일 뿐’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토니와 베로니카, 그리고 에이드리언을 중심으로 사건이 일어났다. 거기에는 토니의 다른 친구도 있었고, 베로니카의 가족도 있었다. 40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 과거의 그 사건을 말하는 방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때 에이드리언은 말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40년이 흘러 사라가 남긴 유언장과 자신이 보낸 편지, 에이드리언의 일기라는 단서로 기억하는 과거의 사건은 토니가 회고하는 방식의 역사일 뿐이다. 고로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으나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단서를 가지고 있는 베로니카가 회고하는 역사가 사실인가? 그 또한 아니다. 베로니카가 조금 더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기억과 피해의식을 중첩해 만들어낸 그녀의 역사일 뿐, 사실이 아닌 것이다.

 

 

소설을 비롯한 책을 읽고 흔히들 하는 말, ‘그래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데?’라는 질문을 나도 해봤다. 하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 어떤 삶도 매일이 일요일 같은 삶은 없다는 정도? 너무 평범해서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며 살아온 토니라는 인물, 평온하게 마무리될 줄 알았던 노년에 예기치 못한 ‘지난 역사’를 맞닥뜨림으로써 대혼란에 빠진 그의 삶이나, 일평생을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며 계획적으로 살았지만, 그래서 더욱 피해의식과 증오로 자신을 옭아맬 수밖에 없었던 베로니카의 삶이나.. 그 어떤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타고나길 다르게 타고 태어난 두 사람은 각각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게 되어있고, 어떤 이는 살아가는 중간에 대혼란을 겪을 수 있겠고, 어떤 이는 사는 내내 혼란 속에서 살 수도 있겠고,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리스인 조르바』는 최근에 화제가 됐었죠? 김정운 교수가 이 책을 읽고 갑자기 대학에 사표를 냈고, 하던 방송을 모두 접었으며, 돌연 일본으로 떠난 것 때문이었는데요. 아무래도 잊었던 '자유'에 대한 욕망의 표출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꽤나 많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이죠. 하지만, 추상적으로 해석하면 그만큼 위험해지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자유에 대한 정의 자체가 지금의 우리와 다를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면 자유일까요? 속박되지 않으면 자유일까요? 가진 게 없으면 자유일까요? 자유에 대한 생각부터 곰곰히 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조르바가 자유를 성취하는 방식은 꽤 독특한 것처럼 보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버찌로부터의 자유인데요. 소싯적에 버찌가 참 좋았던 모양입니다. 돈이 생기면 생기는대로 버찌를 사먹던 조르바는 도통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먹으면 먹을수록 더더더 먹고만 싶었던 거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아버지 지갑에서 은화 한 닢을 훔쳐 버찌 한 소쿠리를 삽니다. 그리고 토할 때까지 먹는 겁니다. 그렇게 버찌로부터 자유를 찾죠. 그렇게 정열의 지배를 끊어내는 겁니다. 고향이 몹시 그리웠던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욕망을 절단합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목젖까지 퍼 넣고 토해 버리는 겁니다. 먹을 걸 마음껏 먹고,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게 자유라고 생각하는 일반 상식과 사뭇 달리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내가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려요. 그러면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 겁니다. (302쪽)

 

다른 예도 있죠. 조국에 대한 생각이 그렇습니다. 사실,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대부분은 민족주의에 젖게 마련입니다. 축구 하나만으로도 대동단결하게 되는데, 전쟁을 치렀다면 그 감정이 오죽할까요? 하지만, 조르바는 역시 달랐네요. 조르바 역시 참 잘 나가는 병사였던 모양입니다. 많은 사람을 죽였고, 전쟁을 진두지휘하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들을 태연하게 해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의 멱을 따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강도 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는데, 나는 왜 그랬을까 생각하는 겁니다. 그건, 그들이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라는 걸. 모두가 구더기 밥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조르바에게는 터키 놈, 불가리아 놈, 그리스 놈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 인이든, 불가리아 인이든, 터키 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서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349쪽)

 

자유란 무엇일까요? 어쩌면, 욕망(집착)하는 마음을 끊어내고 다시 맞닥뜨리더라도 그것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야 가능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조르바처럼 되기는 참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르바는 '되기'에 선수죠. 조르바 사전에는 흉내내기란 없습니다. 그의 앞에 육반이 있으면 그 마음이 육반이 되게 합니다. 갈탕광이 앞에 있으면 그 마음은 갈탕광이 됩니다. 어정쩡하게 굴다간 아무것도 되지 않으니까요. 그의 파트너, 두목(카잔차키스)은 그를 만나고 어떻게 변했을까요? 여자랑 책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책을 선택하겠다던 두목이었는데요. (뜨악! ㅋ) 두목의 행보 또한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두목은 끝내 책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해서, 버찌를 끊어냈던 조르바의 방식을 취하기로 작정합니다. 토할 때까지 책을 읽겠다는 거죠. 나름 반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 이후,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책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궁금하네요. 어쨌든 약력으로만 보면, 번역만 하던 카잔차키스는 처음으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써냈구요. 이후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눈에 띠는데요. 다른 책을 읽어보지 못한 저로써는 이 정도로밖에 추측할 수 없다는 게 아쉽네요. --;;

 

 

인상적인 부분에 대한 표식입니다. 참, 많죠~잉! ㅋ 한번 읽고나면 스토리 정도는 금새 파악이 됩니다. 별 스토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해요. 조르바의 말과 행동이 참 중요한 책이니까요. 그 이후에는 아무 페이지나 읽어도 좋더라구요. 뭐, 어디를 펴도 금을 캔 기분이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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