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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을 좋아하지 않는 개인적 취향 때문에 관련 도서는 잘 읽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처럼 만난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은 나의 편견을 완전히 뒤집어놓았고, 지금은 비슷한 느낌의 책이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다. 하지만, 그런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자전거를 좋아하기 때문에 자전거 여행에 관련된 책만 주구장창 찾고 있는데, 대부분 조금 읽다가 책장을 덮게 되었던 것. 미디어의 개념이 바뀌면서 많은 이들이 글을 쓰게 되었고, 그것이 출판으로 이어지기까지 하지만, 역시 책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어떤 측면에서는 배울 기회가 없는 사람들에게 잔인한 말이 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내용의 무게가 달라지니 이 말을 가볍게 넘길 수도 없다. 같은 맥락에서 정원진의 <일본 열도 7000km 자전거로 여행하다>라는 책은 꽤 무겁게 만날 수 있는 책이고, 그래서 더 반가웠다.

개인적으로 가슴을 울리는 책을 구분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펜’이다. 펜을 들게 만드는 책이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에 줄을 긋게 만들고, 노트에 옮겨 적게 만드는 힘을 가진 책이 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생산’이다. 책을 읽는 동안 생각을 낳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2장 가까이 메모를 했다. 지금은 아무 의미 없어 보이지만, 우연히 펼칠 때마다 다시 나를 깨울 구절들이 되어 줄 것이다.



저자는 친구들이 대학 도서관에서 취업 준비할 때 손바닥만한 창유리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시를 쓰던 청년이었다고 한다. 백수를 자청하며 지내던 어느 날, 일본 자전거 일주를 계획한다. 머리와 책으로 행하는 백수 생활을 하다가 인도와 네팔 여행 후 몸으로 실천하는 백수의 맛을 깨닫고는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고 그것이 자전거 여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오카 -  도쿄 - 아오모리 오마항 - 하코다테 - 오타루 - 마이즈루 - 다네가시마 - 야무시마 - 후쿠오카로 돌아오는 여행을 했다. 그는 여행하는 내내 유스호스텔에 묶기 보다 야영을 즐겼고, 배를 탈 때를 제외하고는 가능하면 자전거와 떨어지지 않았다. 밥과 고추장, 밥과 카레를 즐겼고, 여의치 않을 때는 도시락과 맥주, 빵과 맥주를 즐겼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커피와 라면을, 씻고 싶을 때는 화장실에서 샤워와 빨래를 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길 위에서 여행하는 법을 몸으로 체득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읽으면, 그를 향해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려 유난을 떨고 싶지만, 이 책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내용이 있기에 조용히 마음 박수를 보내게 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좋은 책은 여행을 하며 느낀 것을 문자화할 때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단순히 여행이 좋다고 하거나 자연의 위대함과 사람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말은 시시하다 못해 뻔하다. 인생의 진리는 단순하지만, 어떤 포장지를 쓰느냐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정도의 차이는 크다. 일본에 간 그가 일본의 어디가 좋고, 일본 사람 누가 좋았고, 무엇이 힘들었고, 그것을 극복해서 뿌듯하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면? 결정적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 겠다고 마무리를 짓는다면? 그건 당신 일기장에나 쓰라고 말하고 싶을 것 같다. 저자는 그가 본 일본을 역사와 정신, 가치, 사람과 연결했다. 작은 어촌의 조명시설까지 갖춘 야구장을 보며 야구를 대하는 일본인들의 진지한 태도를 엿보고, 주민이 직접 주최하는 지역 축제를 보며 ‘쇼’가 되어버린 한국의 축제를 떠올리고, 노부부가 바라보는 삶의 태도를 보며 암중모색과 방황에 여념이 없는 우리 모습을 반성하고, 자꾸 늘어가는 자신의 짐과 생각을 보며 여행이 배설이며 버리는 연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일본의 온천욕을 경험하며 우리의 급조된 온천 문화를 비판하고, 충분히 도로를 놓을 수 있음에도 자연을 오롯이 지킨 아마노하시디테를 보며 청계천을 비롯한 한국의 무분별한 개발주의를 떠올렸다. 이 외에도 백수답게 백수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청년 실업에 대해서도 대안을 찾아본다. 도보 여행자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쇠유'라는 협회를 통해 비행 청소년을 감옥에 넣는 대신 걷기 여행을 통해 몸과 정신의 균형을 찾아주고 있다는 화두를 던지며 우리 청년 백수들에게 취업 박람회나 각종 자격증의 압박 대신 여행을 지원해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자전거 여행을 시스템화했으면 한다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한다. 

책을 쓰기 위해 여행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쓰는 것이 몸에 베어 있어 여행을 다니는 내내 날적이(일기)를 썼다. 그것이 책을 낼 때 큰 도움이 되었을 거다. 하지만 처음부터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스스로에게 진솔해질 수 없었을 거란 생각도 든다. 그런 면에서 출판을 염두에 둔 여행일지를 썼던 홍은택과 구별되지만 개성의 차이라 해둔다.



나는 책이 시시해지면 ‘자전거 얘기라도 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단 한번도 들지 않은 걸 보면 나는 이 책에 반한 것이 틀림없다. 단,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다. 글에서 여러 차례 느끼게 되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성을 한 곳에 머무는 존재, 움직이지 않는 존재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오해이다. 그리고 좀 깬다. ^^; 관련 구절을 옮기며 포스팅을 마무리한다.

“은밀함, 그윽함을 간직한 골짜기와 숲으로 이루어진 야쿠시마가 여자라면, 별이 총총한 하늘 밑에 우주센터가 있는 다네가시마는 남자다. 심산유곡의 야쿠시마는 내부로의 지향을, 수많은 별 속으로 로켓을 쏘아올리는 다네가시마는 외부로의 지향을 뜻한다. 내부로의 지향이 정주성이라면 외부로의 지향은 유목성이 아닐까.”  - 에이~ 반성하시길! 인간은 모두 정주성과 유목성을 지향한다. 무엇에 더 매력을 느끼냐는 개인적 차이지, 남녀의 차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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