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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와 책에 빠져 사느라 영화 못 본지 한참 됐다. ‘영화 없이 못 살아’ 정도는 아니어도 앉은 자리에서 세 네 편은 너끈히 볼 정도인데, 살다보니 이렇게 된다. 실로 오랜만에 만난 영화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제목, 배우와 감독(나중에 알았지만 좋아하는 감독이다) 세 박자가 쿵짝 맞아버린 이 영화. 간략한 느낌을 적어본다.

굉장히 느린 이야기라고 들었다. ‘현빈 효과’를 쫓아 영화를 선택했다가는 낭패를 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시크릿 가든에서 보여줬던 화끈하면서 성격까지 급한 까칠한 주원은 없다. 관계에 소극적이고 참는 게 차라리 속 편한 어떤 측면에서는 숨 막히는 지석이 있을 뿐. 바람난 유부녀 역할을 한 영신(임수정)이라고 해서 그리 빠르지도 않다. 집을 나가겠다며 짐을 싸는데 짐을 싸고는 있는 건지 도통 정리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다 괜찮다는 이 남자


지석은 다정한 남편처럼 보인다. 일본 출장 가는 영신을 공항에 데려다 주는데, 차 안에 있는 내내 다정하게 말을 붙인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영신은 생각난 듯이 이별을 통보한다. 그 순간 차를 갓길에 세우며 흥분하는 지석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지석은 운전을 계속한다. 아마도 자신은 괜찮을 거라면서- 세상에 이런 태도가 있을까. 아내의 불륜 앞에서 말이다.

출장에서 돌아온 영신은 날을 잡아 짐을 싼다. 나가든 말든 집을 나가 방황할 게 뻔한데, 지석은 집에서 짐 싸는 일을 돕는다. 영신이 아끼던 찻잔을 정성스레 포장하고, 커피를 내려 가져다 준다. 식당을 예약해 맛있는 저녁까지 사 줄 계획까지 세웠다. 아내를 떠나 보낼 채비치곤 당혹스런 리액션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화 안 나?” “소리 안 질러?” 보는 사람이 대신 소리치고 싶은 심정까지 든다.

는 정말 다 괜찮은 걸까? 감자 샐러드에 넣을 양파를 썰어달라는 영신의 부탁에 “응” 대답하며 양파를 썰다가 눈이 매워 눈물을 흘린다. 눈물이 나도 기어코 다 썰고서야 눈을 씻으러 간다. 그리고 운다. 그때서야 운다. 마음이 턱 놓인다. 슬픈 거 맞구나 싶어서. 안 괜찮구나 싶어서.

모든 것이 괜찮지 않은 이 여자


영신은 바람난 아내다. 음료수 건네듯 이야기 했지만, 나름 얼마나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꺼낸 이야기일까.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다른 남자가 좋아져서 집을 나가는 아내라고 보기에는 미련이 너무 많아 보인다. 짐을 정리한다고는 하는데 정리하는 내내 옛 추억을 꺼내 회상하기에 바쁘다. 함께 요리 공부했던 책을 보며 너덜대는 페이지를 테이프로 꼼꼼하게 붙인다. 틈이 날 때마다 지석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 머핀 등 간식을 챙겨 먹고, 지하실 물건들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영신은 다 괜찮은 것처럼 굴다가 불쑥 화를 낸다. 집 나간다는 아내에게 화 한번 내지 않고 다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지석에게 “자기, 참 나이스한 남자야.”라며 비꼬기도 한다. 지석과 사는 5년 동안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난 괜찮아.”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며.
그렇게 느릿느릿 흐르는 집 안에 불쑥 찾아 들어온 고양이 덕분에 서울로 나가는 길이 막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신은 그제서야 여유를 찾은 듯 보인다. 옛날 생각에 스파게티를 함께 만들면서, 지석에게 야채를 썰어 달라 부탁하면서 예전의 그들로 돌아간 것처럼 저녁을 맞이한다.

떠나간다 해도, 아니 떠나간다면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될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이 여자.

이별하기에 너무 빠른 시간

짐을 싸는 내내 비가 내렸다. 런닝 타임 내내 비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그리고 두 컷 정도? 햇살을 받는 집안 풍경이 교차 편집됐었다. 이 장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말끔히 정리된 것으로 보아 영신이 집을 나간 것을 암시한다 보이고(영화에서 결말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그들의 관계가 호전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기에, 결론은 알 수 없다. 우리들의 경험에 비추어 이런 저런 결말들을 짐작할 뿐.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런 식의 결말은 아쉽지만, 내내 마음에 남는다. 무 자른 듯한 결말은 화끈하지만, 여운이 금세 사라진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사실, 그간의 애틋함이 떠올라 사랑을 확인하는 것도 우습고, 그렇다고 해서 이젠 안녕! 이별하는 것도 팍팍하다. 인생사가 그렇듯 행‧불행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이 분명하다.

영화에서 설정한 세 네 시간은 참 느리게 흐른다. 짐을 싸는 동작, 커피를 내리는 시간, 야채를 써는 모습, 대화의 템포까지도 느릿느릿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참 빠르게 느껴졌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면, 스파게티를 다 만들어 먹고 나면, 방이 다 정리되고 나면 사랑하던 시간에서 사랑하지 않는 시간으로 옮겨갈 것인데, 그걸 차마 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해서 영화는 과속으로 결말까지 내달렸다는 느낌을, 나는 받았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자, 휴-하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직, 끝은 아니구나. 

 


마지막으로! 둘의 연기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석 역을 분한 현빈은 온몸으로, 손끝까지 연기한 것으로 보인다. 비에 젖은 물건들을 닦아내는 모습, 야채를 써는 손 끝, 찻잔을 포장하는 표정 등을 보면 참고 또 참는 지석이 맞다. 영화 속에 현빈은 없다. 영신 역의 임수정. 예전부터 그녀의 표정 연기가 좋았다. 그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상실감이 너무 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정을 쫒게 된다. 섬세한 연기가 잘 어울리는 둘을 보는 기쁨만으로도 충분한 영화였는데, 영화까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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