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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책이 참 좋았습니다. 도피행각을 벌이기에 적합한 책이었거든요. 나만의 세계에 빠지는 게 이상하지 않았고, 과거에 연연하며 사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책을 읽기 힘든 순간이 오더군요. 저는 하루키의 책을 차근차근 읽어온 독자가 아니어서 출간 순서에 따라 읽지는 못했어요. 『상실의 시대』 이후, 『해변의 카프카』『양을 쫓는 모험』『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신의 아이들은 춤춘다』『1Q84』등을 신나게 읽다가 『태엽 감는 새』를 읽던 중, ‘아, 더 이상 못 읽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이유를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는데, 특히 내면 세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공감이 되지 않더라구요. 이번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으면서 동일한 감정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거의 절정에 이르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희망을 발견했는데요. 그것은 이 글의 말미에 밝힐까 해요. ^^
하루키는 개인의 세계에 관심이 많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 매력에 빠진 사람도 꽤 많을 것 같다. 게다가 ‘우리는 하나’, ‘패밀리’, ‘가족공동체’ 등 단합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민족적 정서에 일침을 가하는 느낌도 없지 않았고! 하지만, 하루키도 변하기는 하는 것 같다.(벌써 환갑을 훌쩍 넘었으니) 인간이란 무엇인지, 우주는 인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 걸까? 작가라면 인간에 대한 관심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겠지만, 하루키가 관심의 방향을 살짝 틀었단 생각이 든다. 과거에는 개인의 정서에 집중했다면, 이젠 인간을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아서인데, 그 증거나 바로 이 책『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라고 생각한다.
오행으로 본 주인공들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나고야에 살고 있는 다섯 명의 친구(고등학생)가 공동체를 만들었다. 굉장히 견고한 모임이었다. 남자 셋, 여자 둘로 이루어진 이 공동체에는 균열의 조짐을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는데, 남녀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이성 관계를 제약한다는 윤리를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떠난 쓰쿠루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나고야에 남았다. 그럭저럭 1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 날 쓰쿠루는 공동체에서 추방당했다.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공동체의 결정이라고만 했다. 쓰쿠루는 이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살아갔고, 16년이 지나서야 그때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등장인물이 가진 색채다. 레드로 상징되는 아카, 블루로 상징되는 아오, 화이트로 상징되는 시로, 블랙으로 상징되는 구로, 그리고 옐로우로 상징되는 쓰쿠루. 이것은 의역학적 관점에서 보는 오행(목-파랑, 화-빨강, 토-노랑, 금-하양, 수-검정)이라 할 수 있겠다.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등장인물이 가진 성격이나 삶의 형태인데, 각각의 인물은 그 색깔이 대변하는 성격으로 규정되고 그들의 미래 역시 비슷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레드로 상징되는 아카를 예로 들어 볼까? 아카는 자신의 뛰어난 면을 내세우지 않고 한 발 물러서서 친구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한번 마음을 정하고 나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양보하지 않는 면이 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규칙이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교사에 대해서는 심각한 태도로 화를 내는 일이 자주 있었다. 천성적으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때때로 울컥하곤 하는 것도 특징이랄 수 있겠다. 아카는 커서 자기계발세미나를 주관하는 기업연수센터를 만든다. 두뇌회전이 빠르고 필요하면 달변가로 변하는 아카는 책략을 꾸미는 타입인데, 자신의 성향에 맞게 미래를 설계한 셈이다. (참고로, 불(火)의 속성은 이렇게 설명되곤 한다. 열정을 간직한 타입으로, 대중의 심리를 잘 읽고, 그렇기에 따뜻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대중의 심리가 잘 읽히기 때문에 대중의 흐름에 영합하기 쉽다) 흑색으로 상징되는 구로는 어떨까? 말이 빠르고 뒤뇌회전이 빠른 편인 구로는 시니컬하기는 하지만 독특하면서도 유머감각이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면 즐거운 사람이다. 그녀는 나중에 물처럼 흘러 핀란드에 가서 살게 됐고, 그곳에서 공예를 하며 특별한 세계를 구축하며 살게 된다. (물(水)은 지혜롭고 영리하다. 물처럼 유연하게 사고가 흘러가는 편이며 유머가 있고, 내면세계에 관심이 많다. 흐르는 물처럼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공교롭게도 이 다섯은 서로를 돕는 한편 자극함으로써 유지되는 관계 속에 놓여 있었던 거다. 오행은 서로를 상생, 상극하며 조화를 이룬다. 특히, 쓰쿠루로 대변되는 황색은 중용을 의미하는데, 마디를 넘기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쓰쿠루를 추방한 것은 공동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각자가 가진 색이 짙고 옅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좀 부족하면 상생하며 순환할 수 있고, 좀 넘치면 상극하며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없는 것은 좀 다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의역학과 소설이 만나는 지점인 서두는, 꽤 흥미로웠다.
의역학과 소설의 잘못된 만남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작가의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그리던 소설과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 훌륭한 재료를 구하기는 했으나, 기존의 방식대로 요리한 느낌이랄까. 특히 죽음 혹은 삶의 상실에 대한 해석 부분은 과거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적어도 우주(소우주)를 언급하고, 의역학을 공부했다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달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식의 소설쓰기라면, 그가 새롭게 시도한 방식은, 새로운 소설쓰기를 위한 방편이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쓰쿠루가 공동체에서 방출되고 난 후의 행적이다. 그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어둠에 세계에 천착해 반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갑자기 확 달라진 외모로(그래서 쓰쿠루가 16년이 흘러서 찾아간 아오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다시 태어났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마치 샤먼이 되는 과정을 떠오르게 한다. 혹은 부처가 되기 위한 고행의 과정일 수도 있겠고! 형식은 빌려왔는지 모르겠지만, 내용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샤먼과 부처. 그들이 변한 것은 비단 외모 뿐일까?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즉각적인 깨달음)를 겪었고, 그렇기에 곧 변했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쓰쿠루가 변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는 그냥 밥을 먹게 되었고, 일상을 살아가게 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과거에 연연하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이 부분 역시 소재는 빌려왔으나, 형식만을 차용한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몸과 우주에 대한 해석 부분이다. 우리는 흔히 몸을 소우주라고 부른다. 몸은 우주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도 지식이 미천해서 그 이상을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쓰쿠루는 구로의 삶을 소우주와 연결해 설명한다. 신천지와 같은 이상적인 공간(핀란드)에서 가족을 이루었고, 만족스러운 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나고야를 떠났다는 이유로 구로를 망명자라 칭하는 쓰쿠루는 망명자였던 구로가 핀란드에 정착해서 평화로워 보이는 가족 구성원을 만들었고, 그것이 바로 소우주와 같다는 논리를 펼친다. 물론, 순환의 패턴을 찾았다는 의미에서 소우주라고 규정했을지도 모르겠으나, 독자 입장에서는 극단적으로 미화시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노력 없이, ‘소우주’라는 단어만을 갖다 대입한 느낌이다. 독자가 소우주를 상상하기 이전에, 소우주라고 명명하여 알려주는 꼴인데, 이것은 소설의 독법과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주제를 담기에는 소재가 조금은 유치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은 좋았다. 하루키가 서 있는 자리가 짐작이 되었달까! 또는 같은 맥락의 다음 소설이 나올 거라는 예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소설은 이것보다 훨씬 더 깊숙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루키의 소설이 아메리칸 스타일이었던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가는 커트 보네거트와 레이먼드 챈들러로 알려져 있다. 또한 하루키 소설에 대한 문단의 평가도 그래왔으니까) 이 소설은, 서구 문학(혹은 문화)에 홀릭되었던 하루키가 동양의 학문(혹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자신을 지금껏 지탱하게 해줬던 아메리칸 스타일과 이제야 관심을 갖게된 학문이 즉각적으로 조화를 이루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책이기도 하구. 그래서였을 거다. 이 책은 듣도보도 못한 퓨전요리를 먹는 느낌이었다. 하루키가 앞으로 이 부조화를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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