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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영화] '다가오는 것들'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by Dreambike 2017. 1. 21.

주인공 나탈리는 바쁘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동시에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일하고 있다. 삶에 흥미를 잃은 어머니는 에피소드 만들 듯 자살 시도를 한다. 지금 가르치고 있는 제자들 뿐만 아니라 졸업한 제자도 살펴야 한다. 이 정신없는 일상이 힘들고 불행한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적어도 여기저기서 나탈리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때로 힘들어보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평범을 가장한 일상에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상투성을 벗어난 자유

시작은 남편의 외도였다. 남편이 외도 사실을 고백했을 때 나탈리는 “왜 그걸 말해? 그냥 모르는 척 하고 살 순 없었어?”라고 묻는다. 자신의 일상에 파열음이 나는 것보다는 일상이 유지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남편은 집을 나갔고, 계속되는 자살 시도로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철학책은 폐간 일로에 처하게 됐고, 아끼는 제자 파비앵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비난을 받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모든 사건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과거에는 힘에 부칠 정도로 삶의 무게를 더하는 방식으로 사건이 일어났다면, 지금은 모든 걸 빼앗기는 방식으로 사건이 다가왔던 것이다.  자신을 필요로 하던 사람들에게서 거부당하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이런 나탈리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감정이 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일이!” 혹은 “나는 끊임없이 희생했을 뿐이야”하는 뉘앙스의 원한 감정이다. 이런 감정을 떠올리는 것은 매체를 통해서 혹은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반응이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나탈리는 이런 예상을 번번이 뒤집는다. 원한 감정을 표출하기 보다는 혼란스러운 감정들과 정면으로 대면한다. 적어도 사건을 통념에 맡기지 않는 것이다.  

 

 

파비앵은 각별한 제자였다. 파비앵은 나탈리의 철학과 배려로 자신이 어려운 때를 견뎌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차를 마시고 자신의 속내를 나누는 장면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예상했다. 남편 하인츠와 헤어지게 되면, 남편의 자리는 파비앵으로 대체되겠구나 하는 거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끝까지 삶을, 인생을, 철학을 나누는 지기로 남는다. 둘의 관계에 대한 상상력은, 나의 상투성에서 나온 뻔한 예측일 뿐이었던 거다. 시골에 공동체를 만든 파비앵을 만나러 가는데, 그녀는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떠나가니, 비로소 완벽한 자유가 찾아왔다”고.

이후 나탈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크게 동요되지 않는다. 자신의 책이 폐간되었음에도 그것을 인정했고, 남편과 아이들이 떠난 집에 홀로 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엄마가 남긴 고양이 판도라도 떠나보낸다. 모든 것을 잃는 방식으로 그녀의 삶이 구성되지만, 그녀는 외롭거나 고독해보이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비로소 일상을 찾은 듯 보였다.

남편 하인츠는 젊은 여자를 만나 25년 동안 함께한 부인 나탈리를 떠났다. 크리스마스에 나탈리를 찾아오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놓고 간 쇼펜하우어의 책 때문이었다. 나탈리가 아이들을 대접하기 위한 요리를 준비하면서 크리스마스 계획을 묻자, “혼자 있을 거”라고 대답한다. 불륜으로 시작된 관계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초대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 서운하지 않냐는 나탈리의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다’고 대답한다. 자신에게는 ‘좋은 책과 살라미, 와인’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래서 부부로 25년을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들갑을 떠는 경우가 없다. 우리가 흔히 서운함이나 증오를 느끼는 지점에서 그들은 다른 감정으로 대응한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현실에서 작동하는 철학 

이 영화는 묻는다. 다가오는 모든 것들은 지금의 삶에 질문을 던진다고. 이럴 때마다 어떻게 대답할 거냐고! 어떤 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계를 새롭게 구성할 거냐고 말이다. 나탈리는 철학에서 찾는다. 학생들에게 루소의 글을 읽어주면서 그의 문장을 아무렇게나 해석하지 말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글에서부터 혁명이 시작되었다면서! 그렇다. 나탈리는 자신에게 찾아온 질문을 철학을 통해 혁명하는 방식으로 답을 찾은 것이다. 고통에 대한 남다른 상상력은 그가 공부한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철학적 동지라고 생각했던 파비앵에게서 비겁한 현실주의자라는 비난을 듣게 된 것이다. 파비앵은 지금의 현실을 견딜 수 없어, 혹은 타협할 수 없어 시골로 내려가 공동체를 꾸린다. 파비앵 입장에서는 혁명을 시도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며, 기껏해야 서명운동에 서명을 하는 정도로 양심을 지키며  사는 건 위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온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 혁명이라는 게 가능하냐는 질문이 아닐까? 이에 나탈리는 자신에게 혁명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그것이 지금 이 현실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혁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명망 높았던 책이 폐간되었을 때도,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담담했다. 폐간 이유는 시대적 감각에 뒤처진다는 것이었다. 표지를 화려하게 만들고, 주석을 달고, 문장을 고쳐 대중적으로 만들어야 판매고를 올릴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탈리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이 태도에서 나탈리의 신념이 드러난다. 시대적 조류가 바뀐다고 해서, 유행과 같은 가치에 휩쓸려 삶의 태도를 쉽게 바꾸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말이다. 철학은 어렵다. 그 어려운 문장을 독해하느니, 쉽게 쓰여진 글이나 말에서 도움을 얻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쉽게 얻은 지식은 삶의 지혜로 작용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철학은 그녀가 '다가오는 것들'로부터 지혜를 발휘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녀가 철학하는 이유는 거대담론에 있기보다, 지금의 현실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힘에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파비앵과 작별을 하고 파비앵은 다시 시골로, 나탈리는 파리로 돌아오는 장면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나를 곤란하게 하는 것들 속에서 살아보겠다는 나탈리가 파비앵보다 더 용감해보이는 장면이었다.  

 

 

대부분의 미디어, 그리고 교육은 '어떻게 살아햐 하는가'라는 질문에 정보를 전달한다. 물론 이 현실 세계를 살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이 많다. 하지만 통념에 묶이도록 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슷한 코드를 가지고 살아간다. 희로애락을 느끼는 지점이 거의 동일하다. 희로애락을 함께할 수 있는 게 축복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을 신파로 만들고, 원한에 휩싸이게 만들고, 자책하게 만드는 코드로 작동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패턴에 ‘왜 그래야 하지?’라는 질문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 같다. 또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그들의 책이 영화를 통해 내내 거론되는데, 그 반가움도 만만치 않다. (물론, 언급이 되는 것이지, 적극적으로 쓰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영화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