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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작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읽은 책이 별로 없다. 『새의 선물』과 『타인에게 말 걸기』 말고는. (이조차 가물가물;;) 언젠가부터 여성 소설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도 같은 심보로 외면하고 있는 중이었다.
은희경 작가의 『태연한 인생』을 읽게 된 것은 아이폰의 팟캐스트 때문이다. 사실, 나는 팟캐스트에 푹 빠져있다. 처음에는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이하, 책간)>으로 시작했다가 지금은 <이동진의 빨간책방(이하, 빨책)>을 번갈아가며 듣고 있다. 책 자체에 차분하게 몰입하고 싶을 때는 '책간'을, 낄낄대며 책을 둘러싼 이야기에 빠지고 싶을 때는 '빨책'을 듣고 있다. 길을 오가며, 자전거 정비를 하며, 요리를 하며, 잠들기를 기다리며 듣는 방송이 얼마나 대단하겠어? 생각할 수 있지만, 실로 내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소설에 대한 작가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것이 그렇고, 책을 가지고 어마어마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는 방식이 내겐 감동 그 자체다.
얼마 전에, '빨책'에 은희경 작가가 나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작품도 작품이지만 작가에 대한 호감도 상당히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이후 '책간'에서 김영하씨가 같은 작품을 다뤘는데, 여운이 깊고도 길었다. 등장인물 중 '류'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낭독했는데, 그 이야기에 빠져서 읽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게 된 것. ㅋ!
『태연한 인생』은 『새의 선물』 이후 은희경의 두번째 대표작이라 꼽고 있다. 읽어보니, 정말 그랬다. (작가도 감개무량할 듯. 어언 15년만 아닌가 싶다. ^^;;) 밑줄 치고 싶은 문장은 넘쳐났고, 부분부분 필사도 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자꾸 곱씹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일과 사랑, 결혼과 가족, 지루한 일상, 권태로운 만남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나는 류의 이야기에 매혹됐다. 류 자체보다도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세상을 이미지로 보는 아버지와 세상을 패턴으로 보는 어머니의 이야기. (애인이 있었던) 어머니의 모습에 첫눈에 반한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을 쟁취한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랑에 빠졌던 그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 이후에 오는 삶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즉, 결혼 이후에 오는 생활에 대한 관심 혹은 책임감 따위는 없었다는 뜻) 서사의 세계에 속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단독자로서의 삶을 살았고, 그 대가로 고독을 떠안고 살았다. 반면, 어머니의 삶을 이끄는 것은 패턴이었다. 때문에 사랑 이후에 오는 생활과 이데올로기라는 서사의 세계를 마주해야 했다. 그 서사의 세계를 거부하는 아버지란 존재는 어머니에게 늘 결핍이었고, 그 부조리함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해야 했다. 이렇게 다른 부모 밑에서 자란 류는 삶에 대해서 이중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살아오는 동안 류를 고통스럽게 했던 수많은 증오와 경멸과 피로와 욕망 속을 통과한 것은 어머니의 흐름에 몸을 실어서였지만, 그녀가 고독을 견디도록 도와준 것은 삶에 남아 있는 매혹이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매혹이라는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곤 했던 것이다. 물론, 매혹의 세계는 상당히 위험하다. 요셉과 사랑을 나누던 류는, 생활과 이데올로기로 들어가는 문턱에서 걸음을 멈춘다. 이별을 선택한 것이다. 매혹을 간직하기로 한 것이다. 매혹이란, 생활로 들어가는 순간 부서지기 마련이므로.
패턴대로 산다는 것은 안정감을 준다.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안에 숨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패턴대로 살기에 인생은 너무 길고 지루하다. 낯선 것으로부터 갖게 되는 긴장감은 패턴을 벗어나게 한다. 그렇게 다른 패턴이 생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패턴대로 살아왔던 우리는, 패턴 이외의 삶을 경험하지 못했던 우리는 쉽게 불안해하고, 패턴을 잠시 벗어났다하더라도 다시 되돌아가려 한다. 그래야 편안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니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 삶의 면면들이 드러났다. 매혹의 세계를 온전히 살아냈던 류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두지 못한 나는, 그런 삶의 방식을 학습할 수 없었다. 방법을 모르기도 하지만, 용기도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서 작은 긴장감이 색다른 삶을 만든다는 것을 배운 것 같다.
참고로, 이 소설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 책은 작심하고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응용했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했던 경험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두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맛본 독자라면,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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