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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는 피로로 푼다 - 한병철『피로사회』

by Dreambike 2012. 8. 2.

예를 들어 보자.


한 남자가 가발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의 패턴에 맞추려면 자유의지에 의한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가령,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아도 꾹 참고 앉아 손발을 빠르게 놀려야 하는 것. 정해진 시간에만 밥을 먹을 수 있고, 화장실에 갈 수 있다. 커피 한 잔, 담배 한 모금의 여유는 사치일 뿐이다. 지각이나 결근 따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복장 불량, 언행 불손 혹은 반항심 등의 이유로 해고를 당해도 ‘불합리’라는 단어조차 꺼낼 수 없다. 가발공장이라는 세계는 금지, 강제, 규율에 의해 움직인다.

 

또 다른 남자는 보험회사 영업직 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사고와 병, 그로 인한 슬픔, 불행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구워삶는 일은 비교적 쉽다. 요즘 사람 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갖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급여도 나쁘지 않다. 기본급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만, 영업직에는 성과급이라는 게 있다. 내가 한 만큼 버는 거다.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면 돈과 명예는 따라온다. 그러니까 보험회사라는 세계는 긍정하고 보는 것, 즉 “Yes, I can"으로 움직인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가. 근대는 규율사회(가발공장)를, 20C 이후는 성과사회(보험회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규율사회를 살아낸 사람들은 대체로 규칙과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즉, 까라가면 까는) 회사생활을 했을 것이고, 그 이후라면 CEO의 마음으로 일하라 말하는, ‘능력’으로 움직이는 회사생활을 했을 것이다. 나이가 어려도, 설사 신입사원이라 해도 능력만 있다면 고속승진을 할 수 있는 게 바로 성과사회다. 한 가지 일 보다는 멀티태스킹에 강한 사람이 인정받는 것이 성과사회다. 불가능은 없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부추기는 게 성과사회다. 성과사회를 사는 우리는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인다. 예전처럼 누가 나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를 관리하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이게 자유가 맞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이렇게 모든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은 우울증 환자와 신경 쇠약자, 낙오자를 낳는다. ‘불가능한 것은 없다’라고 말하는 세계에서 나는 아무것도 가능한 게 없다면? 하하(MBC 버라이어티 무한도전에서 땅꼬마를 맡고 있음) 말마따나 미추어버리지 않겠는가. (^^;)

 

 

성과사회, 즉 긍정사회는 탈진에서 오는 피로(이름하여, 우루사 피로)를 낳는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즉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을 소멸해버리는 것. 사는 게 피곤해 죽겠는데 나만의 생각이 뭐 중요하겠는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6일 동안 일하고, 7일째 되는 날 쉬었다고 한다. 그 막간의 시간 동안 생각이란 것을 했다. 자신의 욕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생각은 피로한 일이지만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피로는 필요하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도 ‘생각’을 해야 한다. 성과(무언가를 이루기 위한)로 이어지는 생각 말고,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어도 좋을 그런 생각 말이다.

 

시대는 언제나 우리를 억압하고 조정한다. 때로는 체감 가능한 감시와 규율과 강제로 숨이 턱턱 막히게 하고, 때로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 뜻대로 움직이게 한다. 이래서야, 로봇과 다를 게 뭔가 싶다. 이중에서 더 무서운 것은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며 인간의 욕망을 이용하는 것이다. 내가 진정 원해서 돈과 명예를 쫓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들 그렇다고 하니까 나도 그것을 원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어 더 열심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학대하게 되는 건 아닌가 생각해볼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생각해야 할 때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부자가 되는 게 맞나? 내가 정말 갖고 싶은 게 명품 가방 맞나? 내 명의로 된 아파트를 장만해서 오순도순 사는 가정을 만들고 싶은 게 진짜 내 욕망인가? 언제 어떤 병에 걸릴지 몰라 건강검진과 각종 보험으로 미래를 대비하는 게 내 의지가 맞나?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행하고 욕망하는 이것들에 反하는 생각과 행동은 피로를 가져다 줄 거다. 그러나 중요한 게 있다. 이런 피로는 적어도 우울증이나 신경쇠약을 낳지 않는다는 것! 이런 피로는 남들과 좀 달라도 충분히 나답게 살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이제 좀 피로해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