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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소설을 대하면 이게 바르가스 요사의 색깔이구나 싶은 게 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파괴되고, 다수의 화자가 무작위적으로 등장하지만 그 안에서 묘하게 질서를 이루고, 어느 순간 스토리가 딱 잡히는데, 그때 ‘와!’하며 감탄사를 날리게 된다. 이런 것이 소설가의 상상력이구나 싶지만 한국적 소설에 익숙한 나는 때때로 피곤함을 느끼기도 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과 친해질 때 따라오는 통과의례랄까.
하지만 『나쁜 소녀의 짓궂음』은 달랐다. 기존 소설과 달리 얌전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착한 소년’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소설을 주도했으며,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 자연스러운 혹은 정상적인(?) 전개를 보였다. 바르가스 요사가 강조하던, 소설적 설득력을 위한 문학적 장치를 많이 사용하지 않은 것도 눈에 띠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대가는 뭘 해도 부족함이 없는 걸까? 어쨌든 익숙한 방식의 전개에 간만에 편안함을 느끼며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바르가스 요사의 다른 소설보다 몰입도가 컸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착한 소년’은 ‘나쁜 소녀’를 만난다. 동네 남자 녀석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착한 소년의 가슴에도 불을 질렀던 칠레 소녀.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칠레에서 온 소녀가 아닌 것이 들통나면서 자취를 감춘다. 풋풋했던 소년의 첫사랑이 이렇게 끝나는가 싶지만, 파리에서 게릴라 전사가 된 나쁜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또 헤어지게 된다. 나쁜 소녀와의 만남은 헤어짐과 동반되면서 40년 동안 지속되는데, 그 동안 나쁜 소녀는 프랑스 외교관 부인, 영국 귀족의 아내, 일본 야쿠자의 애인 등으로 모습과 이름을 바꾸면서 등장과 퇴장을 반복한다. 그 가운데 착한 소년의 사랑은 더없이 커지고 상처도 커진다. 나쁜 소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연애도 결혼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착한 소년은 나쁜 소녀가 심신이 망가진 후에야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이 역시 소녀에게 프랑스 국적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말이다. 이제 나쁜 소녀는 착한 소년의 곁에 머물게 될까?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하며 끝을 맺게 될까? (궁금증 유발을 위해 결말은 살짝 감추는 센스를 발휘해 본다)
나쁜 소녀는 착한 소년을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나쁜 소녀는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 가진 게 없었지만, 가슴 속에 가진 야망은 누구보다 컸다. 하지만 스스로 성공하는 어려운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돈과 명예를 가진 남자를 통해 쉽게 이루려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나쁜 소녀가 마음 먹은 대로 일은 이루어진다. 나쁜 소녀에게 착한 소년의 삶은 너무도 평이하다. 일한 만큼 벌어, 먹고 살 정도로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기질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착한 소년을 사랑하지만 소년의 옆에 안착할 수 없는 모험가적 삶의 태도를 버릴 수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나쁜 소녀는 정말 나빴을까?
소녀 앞에 붙은 수식어 ‘나쁜’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나쁘고 착한 것의 구분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우리를 따라다니는 관습과 모종의 규칙들은 옳고 그름의 잣대로 이용되고는 한다. 소녀의 행동은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봤을 때 나쁘다(고 판단한다). 소녀를 사랑하고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착한 소년을 이용하고, 게다가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자꾸 나타나 약올리는 것도 괘씸하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봤다. 소년은 착하다(고 판단한다). 페루를 떠나 파리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던 소년은 일찌감치 꿈을 이뤘고, 그 이상의 욕심도 없었다. 통역을 하며 샐러리맨으로 평범하게 살다가 자신이 사랑하는 소녀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겠다. 하지만 ‘나쁜’ 소녀를 만나면서 소년의 삶은 엉망이 됐다. 소녀와 함께 있기 위해 일을 거절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지라 연애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게다가 소녀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는 그녀를 돕게 위해 재산을 탕진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나쁜 소녀의 삶을 이해한다. 천편일률적이었던 그의 삶이 나쁜 소녀로 인해 너무도 다이내믹해진 것이다. 나쁜 소녀는 그에게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착한 소년에게 끊임없이 민폐만 끼친 것일까?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늘 그 욕망을 감추면 살았던 착한 소년에게 소설로 쓰기에 좋은 ‘소재’를 제공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말하는 것 같다. 소설가에게 어느 정도의 위기는 필요한 것이라고. 착한 소년이 지향하는 삶의 방식으로는 소설을 쓸 수 없다고 말이다. 해서 나쁜 혹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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