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거창한 이야기이다. 1894년부터 95년까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자전거 세계일주라는 쾌거를 이룬 과정을 상세하게 그렸다. 주인공인 애니 런던데리가 이 업적을 통해 어떻게 영웅이 되는지, 또 어떻게 사회적 성공을 거머쥐는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금의 관점에서 좀 역겹기는 하지만 말이다.
두 남자의 내기에서 시작된 세계일주
여성으로서의 역할이 더 억압적이었던 시절, 세 아이를 둔 일하는 엄마로서의 삶에 싫증이 난 애니는 두 남자의 내기에 승부수를 던진다. 어떤 여자도 자전거로 지구를 돌 수 없을 거라는 보스턴의 부유한 두 사업가의 내기를 듣고, ‘내가 해보겠다’며 나선 것.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여행 경비를 제외하고 5,000달러를 벌어야 하며, 의사소통은 영어만 가능하고, 지정된 숙박 업소에 등록을 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이 뒤따르지만, 성공하면 추가로 10,000달러를 받게 된다.
억압된 여성을 해체하는 작업 그 자체
남성의 탈것이었던 자전거를 타는 것도 꼴불견이라 손가락질 받던 시절이었다. 남성 자전거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겠다 나선 것도 모자라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바지(블루머)를 입는다. 애니는 블루머를 입고도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200번의 프로포즈를 받았다며(애니는 결혼한 사실을 숨겼었다), 블루머를 꺼려하는 여성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한다. 자전거는 여성 해방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자전거 덕분에 바지를 입게 되면서 신체적으로 자유로워졌고, 탈것을 이용한 이동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역사의 한가운데 애니가 있었고, 중심적 역할을 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집에는 남편과 자신이 돌보아야 할 세 아이가 있었다. 당시 가족 돌봄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시대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걱정 따위는 애니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날 돌파구가 생겼다는 것에 기뻤을 뿐이다.
가운데 사진은 애니 런던데리(본명, 애니 코프초프스키)의 초상이고, 오른쪽 사진은 아시아 전쟁 당시 포로로 잡혀가는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애니는 이를 이용해 돈을 벌기도 했다)
거짓말로 세계일주
이 일로 영웅이 된 애니의 세계일주 스토리를 보며 감탄만 연발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실력도 없고, 끈기도 없고, 진정성도 없고, 무엇보다 거짓말로 범벅이 된 여행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었다. 우선 그녀는 자전거로 세계일주를 하지 않았다. 필요하지 않을 때에도 철도와 증기선, 자동차를 마음껏 이용했다. 자전거를 매우 잘 타는 것도 아니어서, 대회 등 실력을 겨루어야 할 때면 피하고 봤다. 떠벌리기 좋아하는 언론을 역이용해서 자신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 돈을 벌었다. 애니의 진정한 목표는 자전거로 지구 한 바퀴를 도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도를 통해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는 것이었다. 그녀의 목표를 알고보니 그녀의 발칙한 행동을 이해하게 됐다.
애니가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의심의 꼬리표는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그녀는 정말 자전거로만 세계일주를 하고 있는 걸까? 강도에게 당했다고 하는데 사실일까? 아시아 전쟁에 휘말려 감옥에 갇혔다고 하는데 사실일까?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러한 부정적인 언론 보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떤 기사든 그녀에 대해 많이 쓰면 쓸수록 그걸로 충분히 좋은 것이었다. 그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혹은 겪지 않은 모든 일까지도 ‘돈벌이’로 연결하는 재주를 가졌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완전한 사기꾼으로만 보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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