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리는 것 같네요. ^^ 여름에 비해 독서량이 늘기는 했는데, 리뷰는 통 써지질 않더라구요. 천천히 한권씩 써나가야 겠습니다. 곱씹을 겸해서. ㅋ 줄리언 반스의 책은 처음이었습니다. 요즘 소설을 통 읽지 않다가 읽게되었는데, 반스의 책을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이었어요. 사유의 폭이 워낙 넓고 깊은 책이라 한번 읽는 것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조만간 다시 한번 읽어볼 생각이에요. 날 추울 때는 라이딩도 좋지만, 독서도.. 참 좋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주인공은 토니다. 주인공 치고 특색이 없다. 아니, 매력이 없다고 해야 할까?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쉽게 질투하고, 생각없이 센척하고, 상처를 받으면 치졸한 언어로 복수를 하는 그런 지질한 사람이다. 그의 예감은 번번이 틀린다. 대학다닐 때 베로니카라는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된다. 깊은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에 대해서 파악조차 하지 못한다. 그녀의 마음을 도통 읽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베로니카의 행동은 토니에게 있어 늘 예상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토니에게 베로니카는 쉽게 잡히지 않고, 도무지 모르겠는 인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환갑이 넘어 다시 베로니카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베로니카의 적의에 찬 시선을 꿰뚫지 못한다. 사십 년을 묵혀둔 한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베로니카에게 뒤늦은 연정을 품는 토니라니! 이 사람 참 철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게 우리인 것 같기도 하다.
제목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토니의 예감은 항상 틀렸는데, 틀리지 않았다니? 옳지 못한 제목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내 생각은 달랐다. 이 제목처럼 딱 맞는 제목이 있을까 싶었던 것. 이것은 주인공 토니를 향한 베로니카의 언어이기도 하다. 연애할 때부터 신물나게 느꼈던 그 눈치없음! 끝까지 알아채지 못할 거라는 베로니카의 예감은 어긋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처럼 집요하게 토니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베로니카의 편협한 시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에이드리언(베로니카의 남자친구)과 사라(베로니카의 엄마)와의 관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장애를 가진 동생, 알코올 중독으로 죽어버린 아빠, 더 멀어져버린 오빠 등, 베로니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토니의 편지 한 장을 두었다. 그렇게 토니에 대한 증오감을 키우는 베로니카의 집요함 역시 토니의 예상과 같았다. 그의 예감 역시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베로니카는 과연, 피해자인가?
이 책은 부분적으로 영화 올드보이를 떠오르게 한다. 세치 혀를 잘못 놀리지 말라는 것 같기도 하다. 토니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에이드리언이 자신의 前여자친구와 사귄단다. 그렇다. 기분 나쁠 수 있다. 내 이별의 원인을 에이드리언에게 돌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촉발된 감정으로 토니는 저주의 말을 쏟아낸다. ‘너희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 아이에게 뭔가 문제가 있어 평생 짐이 되었으면 좋겠다. 베로니카는 엄마라는 사람도 신뢰하지 않는 쓰레기니, 확인하고 싶다면 은밀하게 그녀의 엄마를 만나봐라’ 등등. 이렇게 생각없이 뱉은 말은 우연찮게 모두 현실이 되었다. 물론 퍼즐이 이상한 모양으로 변형되기는 했으나 토니의 말은 거의 실현되었다. 이렇게만 보면, 이 모든 상황이 토니가 쏟아낸 저주의 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전 애인과 친한 친구의 연애 사실에 충격을 받고 폭력적인 말을 했다고 치자. 그 편지를 고이고이 간직한 채, 자신이 겪게 된 모든 불행의 원인을 토니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토니를 (엄마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유혹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것, 이후에 토니의 친구인 에이드리언을 사귄 것, 그렇게 사귄 에이드리언을 같은 방식으로 집으로 데려간 것 등등. 베로니카 역시 이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불행을 ‘토니’라는 회로를 통해 해석할 수밖에 없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생각했다. 베로니카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일 수도 있다고. 자신이 놓은 덫에 자신이 걸려들었음을 인정해야 될 때라고. 어쩌면 토니는 우연히 걸려든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달리 쓰여지는 역사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역사’란 단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을 제대로 통과하려면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 혹은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역사라고 해서 거창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개인에게 일어난 조그만 사건도 역사라고 볼 수 있으니까!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치자. 당시에 겪는 감정과 그 사건을 서술하는 방식! 그것이 십년이 지나도 동일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또, 같은 사건을 겪은 두 사람이 각각 기억하고 서술하는 방식이 똑같을까? 그럴 수 없을 거다. 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다를 것이고, 십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십년 후에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달리 회고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역사라는 게 믿을만한 것이기는 한 건가. 이런 차원이라면 ‘역사란 살아남은 자의 회고일 뿐’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토니와 베로니카, 그리고 에이드리언을 중심으로 사건이 일어났다. 거기에는 토니의 다른 친구도 있었고, 베로니카의 가족도 있었다. 40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 과거의 그 사건을 말하는 방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때 에이드리언은 말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40년이 흘러 사라가 남긴 유언장과 자신이 보낸 편지, 에이드리언의 일기라는 단서로 기억하는 과거의 사건은 토니가 회고하는 방식의 역사일 뿐이다. 고로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으나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단서를 가지고 있는 베로니카가 회고하는 역사가 사실인가? 그 또한 아니다. 베로니카가 조금 더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기억과 피해의식을 중첩해 만들어낸 그녀의 역사일 뿐, 사실이 아닌 것이다.
소설을 비롯한 책을 읽고 흔히들 하는 말, ‘그래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데?’라는 질문을 나도 해봤다. 하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 어떤 삶도 매일이 일요일 같은 삶은 없다는 정도? 너무 평범해서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며 살아온 토니라는 인물, 평온하게 마무리될 줄 알았던 노년에 예기치 못한 ‘지난 역사’를 맞닥뜨림으로써 대혼란에 빠진 그의 삶이나, 일평생을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며 계획적으로 살았지만, 그래서 더욱 피해의식과 증오로 자신을 옭아맬 수밖에 없었던 베로니카의 삶이나.. 그 어떤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타고나길 다르게 타고 태어난 두 사람은 각각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게 되어있고, 어떤 이는 살아가는 중간에 대혼란을 겪을 수 있겠고, 어떤 이는 사는 내내 혼란 속에서 살 수도 있겠고,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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