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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차리 추천북

그가 변했다 - 이승우『지상의 노래』

by Dreambike 2013. 2. 20.

『생의 이면』, 내가 이 책을 읽기는 했었나 싶을 정도로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읽었다고 단언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 감동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궤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고 껍데기만 붙잡고 있는 꼴이니;;) 책을 읽는 동안 무언가 콕콕 찌르는 것 같아 창피했고, ‘생’에 대해 배우는 것 같아 고맙기도 했다. 그 강렬한 기억은 ‘이승우’라는 석 자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이동진 기자가 이승우 작가의 광팬임을 자청했을 때 동질감을 느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부터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소설을 멀리 했고, 진지한 사유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위험하다 생각해 가벼운(혹은 실용적인) 책을 골라 읽곤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취업 때문에 고민하고, 상사에 인정받으려 하고, 실적 때문에 고민하며 박터지게 살던 시간은 지나갔다. 시류에 휩쓸리는 천편일률적인 청춘은 내 인생을 통과한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의 소설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에 대한 사유 속으로 빠져들 각오가 되었다고 할까? 조금 더 빨랐다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 생각한다. 이나마 다행이다. ^^;

 

이번 신작인 『지상의 노래』는 무척 재미있다. 이승우 작가 역시 인정하는 부분. ^^ 작가는 이전에 비해 활동 영역이 넓어졌다고 한다. 다양한 사람과 사건을 통해 '경험치'를 넓히니 소설에도 생기가 생긴 것. 경험을 기피하며 사색을 주로 하던 시절에 『생의 이면』과 같은 작품이 나온 거겠지! 나는 뭐, 다 좋은 것 같다. ㅋ

 

 

이 소설은 재미있는 데다가 삶에 대한 고찰이 있고, 사유를 곱씹어 뱉어낸 작가의 분투가 보이고, 나름 서스펜스도 있다. (하하) 역사적 사실을 불러내기도 하는데, 이것으로 소설을 한층 입체적으로 만들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책을 다 읽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흥미를 마구 유발하는 책도 아닌데, 책을 덮고 난 이후에도 나의 감정은 이 책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듯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이런 방식의 소설(혹은 모든 매체)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떠올랐다. 실존 인물(세종/한석규, 정기준/윤제문)을 중심에 놓고 사건을 전개하되, 이에 양념을 칠 가상의 인물(장채윤/장혁, 소이/신세경)을 설정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 말이다. 이 소설도 비슷하다.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다루되, 가상의 인물인 후를 설정해 이야기를 버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흥미로운 구성이다. (^^) - 그런데 반대일 수도 있다. 작가는 ‘후’를 먼저 설정한 이후에, 이에 살을 입히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을 가미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엄밀히 따지면, 소설은 5개의 챕터로 나뉜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어쨌든 모두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소설은 천산 수도원에서 벽서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천산 수도원의 존재를 알린 강상호(수도원을 처음 발견한 죽은 형, 강영호의 유고를 바탕으로 책을 펴낸 인물)의 글을 읽고 천산 벽서에 대한 기고문을 쓴 차동연이라는 기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2~3장에서는 과거로 돌아가, 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연희라는 사촌 누나의 성폭행과 가출을 겪은 후는, 그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죄책감에 누나를 성폭행한 박중위를 찌르고 천산 수도원으로 몸을 피하게 된다. 4장에서는 다시 차동연이 장을 만나 천산 수도원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내용이 전개된다. 5장에서는 장의 고백 속에서 한정효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한정효는 유신에 깊숙이 개입되었던 인물인데, 이에 회의를 느껴 그만두려고 하자 ‘위험 인물’로 간주되어 수도원에 감금된다. 6~7장에서는 천산수도원을 나와 연희 누나를 찾아내는 후의 이야기가 나오고, 8장에서는 후(과거의 인물)와 차동연(현재의 인물)의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되며 끝을 맺는다. 결말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생략하는 걸로! ㅋ;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희망하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필귀정, 인과응보 등 모든 것은 옳은 이치대로 돌아갈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 말이다.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을 보며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될 거라며 위안을 삼곤 한다. 하지만, 세상이 그러한가? 이 소설은 같은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저지른 악행은 천산이라는 수도원에 남아 있지만, 실체가 사라진 마당에 진위 여부를 가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하여, 그 사건은 왜곡된 채로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문체에 대해 말하고 싶다. 소설도 재미있지만, 작가의 문체를 읽는 맛이 굉장히 좋았다. 이승우 작가는 (이동진 기자 말대로) 중문쓰기의 일인자이고, (김중혁 작가 말대로) 둥지를 짓듯 공을 들여 문체를 만들어낸다. 이런 문장들을 이렇게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자칫 중언부언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이승우 작가의 깊은 사유를 발견할 수 있는 문체가 가득 담긴 책이다. 필사 욕구를 불러내고 있다. (읽어야 하는 책만 없다면 당장에 시작했을 것 같은 기분인데 말이다)